신라의 성씨와 육부는 분명 관계가 있다.
사부지가 입종이다. 입종의 입(立)의 훈은 설이다.
그렇다면, 사부지의 '사' 또는 '삽' 과 '서다' 또는 '설'과는 어떠한 관계일까?
뜻이 통하는 것일까? 소리가 통하는 것일까?
삽량주의 '삽'과 통하는 것은 아닐까?
솔거의 '솔'은 높다는 뜻이라고 한다. 솔개의 '솔'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현대한국어가 한자로 인해 잃어버린 고대한국어의 유물을 많이 보존하고 있다고 하는 일본어에서는 하늘이 '소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혹시 사부지의 '삽'은 높고 존귀하다는 뜻이 아닐까? 우리나라의 설날의 '설'과도 통하는 의미가 아닐까?
또한 이 '설'의 음은 신라 육부중 습비부의 '습비'와 통하는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삼국유사에 따르면, 습비부는 고야촌으로 그 촌장인 호진(虎珍)이 설(薛)씨의 시조이기 때문이다.
탁부(량부/훼부/ 벌판)가 이씨이고, 사탁부(사량부/사훼부/새로운 벌판)는 정씨, 모량부는 손씨가 되는데, 어찌해서 탁부와 사탁부의 주요 지배층은 김씨이고, 모량부의 주요 지배층은 박씨이었을까?
나의 추측으로는 탁부와 사탁부 중의 한곳이 석씨의 지배기반이었는데, 사실 석씨는 동쪽 해안가에서 와서 원래 호공의 땅을 가로챈 것을 볼 때, (석탈해 신화) 탁부나 사탁부의 어떤 지역을 일시적으로 지배하였을 수 있다. 그러다가, 석씨 왕족 자체가 김씨 왕족으로 동화 흡수되었을 수 있을 것이다.
원칙상으로 보면, 탁부의 촌장 알평이 육부를 대표한다고 볼 때, 그 지역이 박씨의 지배권역이었을 수 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박씨의 지배영역은 모량부로 밀려난다. 그리고는 주로 김씨 왕권에서 왕비를 제공하는 왕비족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과연 당시 혈족의 개념은 있었을지 몰라도, 성씨의 개념은 단연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육부의 계통은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오늘날 성씨의 대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한 형제가 탁부와 사탁부로 갈리는 것일까?
포항 냉수리비에 따르면, 법흥왕(모즉지)은 탁부인데, 사부지는 사탁부이다.
탁부와 사탁부는 왕의 직할지였을까?
진평왕 때까지, 궁은 대궁과 양궁(탁부/양부의 궁) 그리고 사량궁(사탁부/사량부의 궁) 있었다고 한다.
대궁이 왕의 궁이고, 양궁이 제2왕(부군), 사량궁이 제3부왕(부군) 이거나
대궁은 정사를 보는 곳이고, 양궁이 왕궁, 사량궁이 태자궁일 수 있다.
즉 탁부는 왕의 직할지, 사탁부는 왕위계승서열1위(왕세자 또는 왕세자, Prince)의 직할지일 수 있다.
법흥왕이 그의 총신 박영실을 부군으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고 한 것도 그렇다.
영실은 박씨였을까? 후대에 박씨로 비정한 것일까?
영실이 모량부(?) 사람이어서 후대에 박씨로 간주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왕이 왕위를 물려주려고 한 것을 보면, 당시에는 분명히 왕족의 일원으로 인정되었음에 틀림없다.
신라에서 6부의 성씨는 당연한 것이지만, 왕족인 김씨와 박씨의 성씨도 후대의 6부 구별을 통해 성씨가 부여된 느낌이 강하게 든다.
실제로 법흥왕의 이름이 중국사서에 모진(성이 모, 이름이 진)으로 나와있다.
그때까지도 신라는 왕실에서조차 성씨에 대한 개념이 희박하였던 것이다.
박제상과 김제상도 마찬가지이다. 사서에 따라서, 박제상인지, 김제상인지 헷갈리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성씨는 원래 존재한 것이 아니었고, 후대에 역사를 기술할 때, 가정하여 붙인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두가지 였다. 한가지는 기지의 사실(김씨/박씨 왕족 계보)과 혈연적으로 닿아 있으면, 김씨가 되고, 그것이 없으면, 당대에 어느 부의 소속이었나 하는 것이었는데,
이 두가지 사실이 서로 다르게 되면, 한편으로는 박제상이 다른 한편으로는 김제상이 되는 것이다.
영실과 이사부(태종)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을까? 둘 다 박씨로 비정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이름이 비슷하다. 공적도 비슷하다. 물론, 영실은 법흥왕의 총신이고, 이사부는 진흥왕의 총신이라고는 하지만, 둘 간의 관계는 예사로운 관계가 아닐 듯한 느낌이다.
그런데 여기서 태종의 '태(苔)'의 훈이 '이끼'이므로 '잇' 음을 따서 이사부를 태종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사람이름이 이끼인 것은 너무도 우스운 일이다. '잇'은 계승의 의미도 있고, 일본어에 보면 '돌'(이시 石)의 의미도 있다. 이것을 가리켜 사음훈차라고 하고있다.(최규성, [놀부와 노리꼬 21쪽])
예를들면 거칠부와 황종이 같은 사람인데, 여기서 '거칠(居柒)'은 한자의 소리를 빌려쓴 '음차'이고, 황종의 '황(荒)'은 한자의 뜻을 빌려쓴 '훈차'이지만, 그 거칠다는 말의 뜻이 거칠부란 이름의 진정한 뜻이 아니므로, 진의훈차(眞意訓借)가 아니고 사음훈차(似音訓借)라는 것이다.(최규성, [놀부와 노리꼬 42쪽])
최규성은 [놀부와 노리꼬]에서 일본어의 흔적을 근거 삼아, 거칠부를 뛰어난 사람(勝夫/승리자)으로, 이사부를 용맹한 사람(勇夫)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감탄을 금할 수 없는 혜안이다.
가야국은(금관가야이거나, 대가야이거나) 계속해서 신라 왕실과 통혼을 하고 있다. 물론 백제도 신라왕실과 통혼하였다. 그런데 보면, 항상 비지배, 비조부, 비지 등의 딸이나 여동생과 그들을 혼인시키고 있다. 이 '비지', '비조'는 과연 어떤 뜻일까? 가야의 문화적 영역이었을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낙동강 이서지역으로 진한의 영역이었던, 창녕은 과거에 비사벌(빛, 불 지역)이었다. 이들과 '비지'계열 인물들과는 어떤 관련이 있었을까?
진흥왕의 이름인 심맥종(삼맥종)의 '맥'은 '보리'의 사음훈차임이 틀림없다. 법흥왕대부터 신라가 불국토라는 전통은 워낙 강하였으므로, 심맥종의 보리는 인도어의 깨달음을 연상시킨다. 석가가 깨달음을 얻은 나무가 보리수이다. 그렇다면, 심 또는 삼은 아마 사미 즉 스님을 뜻하는 것이었을 수 있다. 그리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미가 왕이 되고, 전륜성왕이 되어 불국토를 다스리는 왕실의 구상이 이루어졌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日 '한강의 기적'을 모욕하지 마라 (0) | 2015.03.29 |
---|---|
조조보다 유비가 대접받는 진짜 이유 - 페북 (0) | 2012.11.18 |
뉴기니섬 역사 - 네이버 지식인 (0) | 2012.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