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외무성이 지난 24일 주미·주한 대사관 홈페이지 등에... 홍보 동영상을... '전후 시대의 국가 건설, 책임 있는 파트너로서의 일본'... "1954년부터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경제 지원 제공에 들어갔다"면서 한국의 지하철 1호선 개통사진, 소양강댐 공사 사진, 포스코 제철소 사진을 차례로 보여준다.


"일본의 지원으로 한국이 발전했다"... "조선을 근대화시켰다"...


우선 규모로 볼 때 전후 한국 경제 재건에 결정적이었던 것은 일본보다는 미국과 유럽의 도움이었다. 광복 후 1960년까지 미국 중심의 무상 원조는 총 30억달러에 달했다... 미국은 1960년대 들어서는 원조를 줄이고 공공차관을 통해 경제개발을 지원한다.


... 일본은 1965년 한국 정부에 무상 3억달러의 청구권 자금과, 유상 2억달러의 공공차관을 합쳐 5억달러를 제공하기로 했다... 한국은 35년간 식민지 상태에서 일본 제국주의 수탈 정책에 희생됐었다.


개발 초기 차관의 70%는 미국과 유럽에서 들어왔다

1962년부터 10년간 한국에 들어온 해외 공공차관은 총 11억9300만달러였다... 미국발... 61%... 일본은 2억5600만달러(22%)다.


... 같은 기간 공공차관과 상업차관을 합친 금액은 32억1400만달러다. 미국에서 (42%), 일본에서 (25%)...


②일본 자금은 일본의 이익에 도움이 되도록 쓰였다

... 산업공해 문제에 봉착한 일본 입장에서 철강공업 설비를 판매할 크고 안정적인 프로젝트가 필요했기 때문에 포철 건립에 동의해 줬다는 연구(부산외대 박영구 교수)도 있다... 일본도 초기 투입된 전통차 186량을 일본 기업인 히타치에서 제작하는 등 수익을 챙겼다.


③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한·일 무역역조 누적액 4900억달러

'기술 제휴'라는 이름의 협력 관계는 일본 기업 입장에서는 노후 기술과 노후 설비를 이전할 기회였던 측면도 있다. 박정희 정부가 중화학공업과 수출 주도형 성장 전략을 펴면서는 중간재 수출 이득이 컸다.


일본은 경제 협력을 강조하지만, 지난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한국의 경제적 어려움을 외면했다... 강만수... 장관은... '현장에서 본 경제위기 대응실록'에서 "외환 위기 당시 일본의 자금 회수는 너무 컸고 너무 빨라 감당할 수 없었다"... 1997년 해외 금융기관들은... 단기차입금의 절반 이상인 375억달러를 회수... 일본이... 단기차입금(218억달러)의 60%인 130억달러를 회수했다.


④식민지 수탈로 독립 직후 세계 최빈국 상태에서 출발한 한국

일본의 식민지 수탈은 자원과 식량에 그치지 않고 징병과 징용 등을 통한 인적 자원 유린까지 겹쳐 독립 직후 한국의 경제 상황을 최악의 상태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일본 우익 일각에서는 식민 지배 시기 식량 증산, 공업 투자, 교육 확대 등으로 한국 경제 발전의 기초를 닦았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도 한다. 허수열 충남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해방 당시 일제 공업 차산 중 남한에 있던 것은 전체의 25%에 불과했고, 그나마 광복 후 혼란과 6·25전쟁 때 대부분 파괴됐다. 또 일본인의 대규모 논밭 소유와 미곡 수탈로 농업 인구 1인당 농산물 수취량은 식민 지배 기간 오히려 3~15% 줄었다. 일제 말기 한국인의 소학교 초등과 진학은 늘었지만, 중졸 이상 학력은 전체의 1%에 불과했다. 일본의 식민 지배는 민족말살정책과 가혹한 수탈 등 서구 열강과 비교해 훨씬 폭압적이었다. (이진석, 김정훈, 선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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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2차 대전 종전 후... 일본 경제를 기사회생시킨 일등공신은 6·25전쟁이었다.


... 한국전쟁 병참기지 역할을 하며 한국전 발발 직후 1년 동안 일본이 누린 경제적 이익은 3억1500만달러(일본 경제안정본부 통계)에 달한다... 1950년 일본의 외화 수입 중 한국전쟁 관련 항목이 차지한 비율은 14.8%에 달했고, 1951년 26.4%, 1952년 38.8% 등 매년 10% 이상 올랐다(일본 외무성 통계). 이 덕분에 일본은 패전 7년 만인 1952년, 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의 경제 규모를 회복했다. (도쿄 = 양지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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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우리나라 포스코와 소양강댐의 경우 대일 청구권 관련 자금이 투입됐다는 점에서 공적원조와는 성격이 다르다.


... 조양현 국립외교원 아태연구부 교수는 "일본이 ODA(공적개발원조)나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요원 파견 등으로 국제사회에 기여한 부분이 있는 것은 맞지만, 문제는 이를 과거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 등과 의도적으로 섞어버렸다는 것"이라며 "사실관계를 모르는 외국사람들이 보면 한국 경제 발전이 전적으로 일본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는 함정이 있다"고 했다. (워싱턴 = 윤정호 특파원, 임민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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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15. 03. 27)


감상: 일본과 엉뚱하게 엮이지 않으려면 눈 똑바로 뜨고 공부를 해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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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성씨와 육부는 분명 관계가 있다.

 

사부지가 입종이다. 입종의 입(立)의 훈은 설이다.

그렇다면, 사부지의 '사' 또는 '삽' 과 '서다' 또는 '설'과는 어떠한 관계일까?

뜻이 통하는 것일까? 소리가 통하는 것일까?

 

삽량주의 '삽'과 통하는 것은 아닐까? 

솔거의 '솔'은 높다는 뜻이라고 한다. 솔개의 '솔'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현대한국어가 한자로 인해 잃어버린 고대한국어의 유물을 많이 보존하고 있다고 하는 일본어에서는 하늘이 '소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혹시 사부지의 '삽'은 높고 존귀하다는 뜻이 아닐까? 우리나라의 설날의 '설'과도 통하는 의미가 아닐까?

 

또한 이 '설'의 음은 신라 육부중 습비부의 '습비'와 통하는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삼국유사에 따르면, 습비부는 고야촌으로 그 촌장인 호진(虎珍)이 설(薛)씨의 시조이기 때문이다.

 

탁부(량부/훼부/ 벌판)가 이씨이고, 사탁부(사량부/사훼부/새로운 벌판)는 정씨, 모량부는 손씨가 되는데, 어찌해서 탁부와 사탁부의 주요 지배층은 김씨이고, 모량부의 주요 지배층은 박씨이었을까?

나의 추측으로는 탁부와 사탁부 중의 한곳이 석씨의 지배기반이었는데, 사실 석씨는 동쪽 해안가에서 와서 원래 호공의 땅을 가로챈 것을 볼 때, (석탈해 신화) 탁부나 사탁부의 어떤 지역을 일시적으로 지배하였을 수 있다. 그러다가, 석씨 왕족 자체가 김씨 왕족으로 동화 흡수되었을 수 있을 것이다.

 

원칙상으로 보면, 탁부의 촌장 알평이 육부를 대표한다고 볼 때, 그 지역이 박씨의 지배권역이었을 수 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박씨의 지배영역은 모량부로 밀려난다. 그리고는 주로 김씨 왕권에서 왕비를 제공하는 왕비족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과연 당시 혈족의 개념은 있었을지 몰라도, 성씨의 개념은 단연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육부의 계통은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오늘날 성씨의 대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한 형제가 탁부와 사탁부로 갈리는 것일까?

포항 냉수리비에 따르면, 법흥왕(모즉지)은 탁부인데, 사부지는 사탁부이다.

탁부와 사탁부는 왕의 직할지였을까?

 

진평왕 때까지, 궁은 대궁과 양궁(탁부/양부의 궁) 그리고 사량궁(사탁부/사량부의 궁) 있었다고 한다.

대궁이 왕의 궁이고, 양궁이 제2왕(부군), 사량궁이 제3부왕(부군) 이거나

대궁은 정사를 보는 곳이고, 양궁이 왕궁, 사량궁이 태자궁일 수 있다.

즉 탁부는 왕의 직할지, 사탁부는 왕위계승서열1위(왕세자 또는 왕세자, Prince)의 직할지일 수 있다.

 

법흥왕이 그의 총신 박영실을 부군으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고 한 것도 그렇다.

영실은 박씨였을까? 후대에 박씨로 비정한 것일까?

영실이 모량부(?) 사람이어서 후대에 박씨로 간주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왕이 왕위를 물려주려고 한 것을 보면, 당시에는 분명히 왕족의 일원으로 인정되었음에 틀림없다.

 

신라에서 6부의 성씨는 당연한 것이지만, 왕족인 김씨와 박씨의 성씨도 후대의 6부 구별을 통해 성씨가 부여된 느낌이 강하게 든다.

실제로 법흥왕의 이름이 중국사서에 모진(성이 모, 이름이 진)으로 나와있다.

그때까지도 신라는 왕실에서조차 성씨에 대한 개념이 희박하였던 것이다.

 

박제상과 김제상도 마찬가지이다. 사서에 따라서, 박제상인지, 김제상인지 헷갈리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성씨는 원래 존재한 것이 아니었고, 후대에 역사를 기술할 때, 가정하여 붙인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두가지 였다. 한가지는 기지의 사실(김씨/박씨 왕족 계보)과 혈연적으로 닿아 있으면, 김씨가 되고, 그것이 없으면, 당대에 어느 부의 소속이었나 하는 것이었는데,

이 두가지 사실이 서로 다르게 되면, 한편으로는 박제상이 다른 한편으로는 김제상이 되는 것이다.

 

영실과 이사부(태종)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을까? 둘 다 박씨로 비정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이름이 비슷하다. 공적도 비슷하다. 물론, 영실은 법흥왕의 총신이고, 이사부는 진흥왕의 총신이라고는 하지만, 둘 간의 관계는 예사로운 관계가 아닐 듯한 느낌이다.

 

그런데 여기서 태종의 '태(苔)'의 훈이 '이끼'이므로 '잇' 음을 따서 이사부를 태종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사람이름이 이끼인 것은 너무도 우스운 일이다. '잇'은 계승의 의미도 있고, 일본어에 보면 '돌'(이시 石)의 의미도 있다. 이것을 가리켜 사음훈차라고 하고있다.(최규성, [놀부와 노리꼬 21쪽])

 

예를들면 거칠부와 황종이 같은 사람인데, 여기서 '거칠(居柒)'은 한자의 소리를 빌려쓴 '음차'이고, 황종의 '황(荒)'은 한자의 뜻을 빌려쓴 '훈차'이지만, 그 거칠다는 말의 뜻이 거칠부란 이름의 진정한 뜻이 아니므로, 진의훈차(眞意訓借)가 아니고 사음훈차(似音訓借)라는 것이다.(최규성, [놀부와 노리꼬 42쪽]) 

 

최규성은 [놀부와 노리꼬]에서 일본어의 흔적을 근거 삼아, 거칠부를 뛰어난 사람(勝夫/승리자)으로, 이사부를 용맹한 사람(勇夫)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감탄을 금할 수 없는 혜안이다.

 

가야국은(금관가야이거나, 대가야이거나) 계속해서 신라 왕실과 통혼을 하고 있다. 물론 백제도 신라왕실과 통혼하였다. 그런데 보면, 항상 비지배, 비조부, 비지 등의 딸이나 여동생과 그들을 혼인시키고 있다. 이 '비지', '비조'는 과연 어떤 뜻일까? 가야의 문화적 영역이었을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낙동강 이서지역으로 진한의 영역이었던, 창녕은 과거에 비사벌(빛, 불 지역)이었다. 이들과 '비지'계열 인물들과는 어떤 관련이 있었을까?

 

진흥왕의 이름인 심맥종(삼맥종)의 '맥'은 '보리'의 사음훈차임이 틀림없다. 법흥왕대부터 신라가 불국토라는 전통은 워낙 강하였으므로, 심맥종의 보리는 인도어의 깨달음을 연상시킨다. 석가가 깨달음을 얻은 나무가 보리수이다. 그렇다면, 심 또는 삼은 아마 사미 즉 스님을 뜻하는 것이었을 수 있다. 그리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미가 왕이 되고, 전륜성왕이 되어 불국토를 다스리는 왕실의 구상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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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는 싸움도 잘했고, 정치와 정책도 잘 폈다. 시문에도 능했으며, 인재를 알아보는 눈도 좋았다. 한마디로 리더로서 손색이 없는 시대의 영웅이었다. 그에 비하면 유비는 우유부단하고 보잘 것 없고 무능한 축에 속한다. 그가 삼국을 통일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조조를 비열한 인간으로, 유비를 영웅으로 생각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적벽대전에서 패한 조조가 도망 길에 관우에게 잡혔을 때 그는 영웅답게 자결을 택하는 대신, 옛 친분을 들먹이며 관우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유비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자신에게 꼭 필요했던 형주땅을 받지 않았다. 그는 그 정도로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 두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체면'이다. 조조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체면을 버렸고, 유비는 체면을 지키기 위해 실리를 포기했던 것이다. 이렇듯 '체면'이란 중국인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기질이다. 따라서 체면을 버린다는 것은 중국인으로서 창피하고 모욕적인 일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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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兄 : 일본에서는 3명의 일본통일을 한 사람을 비교하는데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토쿠가와 이에야스. 일본에서는 토쿠가와 이에야스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지. 세 명 중 조조에 가장 가까워. 그렇다고 다른 두 사람이 유비와는 또 전혀 비슷하지도 않고. 유비와 비슷한 장수는 다테 마사무네라고나 할까. 다테 마사무네는 전국시대에 슬기롭게 헤쳐나와 토쿠가와가 가장 두려워하는 장수였지. 동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칼을 갈고 있었지만 어쩔 수는 없었지.

 

 일본에도 체면이 아주 중요해. 한국, 중국, 일본 중에 체면이 가장 중요한 나라라면 일본일 것이야. 체면때문에 사무라이는 할복을 했으니까. 체면은 곧 프라이드가 아닐까 하는데. 형태는 틀리지만 3 국의 체면문화는 많이 다른 것 같아. 그것은 화장실문화에서도 잘 반영이 되어 있어. 3 국의 화장실문화가 어떻게 다른지 한 번 생각해 봐. 현대식 말고 재래식 기준으로. 재미있어.

 

그리고 왜 우리는 중국의 그런 관념으로 유비를 영웅으로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의문이었지. 다 사대사상의 영향이 아니겠나. 조조는 오늘날은 가장 휼륭한 인물로 평가하겠지.

 

성경에 근거하면 체면 즉 프라이드는 우리 인간이 가장 하나님에게 접근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으로 너무나 자주 지적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자신을 과신하고 교만해지는 것이 곧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겠지요. 그런 면에서 일본인이 왜 가장 크리스찬이 적은가 현재도 1% 정도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가장 자기중심적인 사고랄까 체면이 가장 우선되고 프라이드가 늘 중심에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와 중국과는 다른 체면이나 프라이드가 있는 것 같지요. 실제 일본인은 정말 겸손합니다. 아주 친절하고요. 그런데, 제가 말하는 것은 논리가 안맞지요. 그런것은 우리가 보는 현상과 나타나야 할 진실과 진리는 늘 괴리한다고 봅니다. 성경은 그 점에서 현상 속에 실제 존재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추가로 중국의 화장실은 나는 중국에 가본 적이 없어서 단지 사진등으로 이야기 들음. 중국의 화장실은 문이 없다고 나와 있습니다. 다들 그냥 앉아서 서로가 정면으로 볼 수가 있지요. 이야기도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한국은 다 똑같은데 화장실은 칸막이로 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칸막이 문도 있는데 한국과 틀린 것은 앉아있는 자세가 화장실 문을 설령 실수로 열더라도 정면으로 앉아있지 않아서 뒷모습만 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세 가지의 경우를 비교하면 삼국의 예의문화 랄까 체면문화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중국은 누가 들어오거나 나가거나 서로가 불편한 것이 없고, 한국은 누가 실수로 문을 열면 서로가 창피하고 일본은 실수로 문을 열어도 서로가 모르기에 얼굴을 붉힐 필요가 없어요.

 

나 : 사회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진 사회에서 이민, 기민, 빈민구제를 잘 하는 종교가 전파됩니다. 종교는 신념체계이므로 그렇게 힘든 경우가 아니면 잘 안 바뀝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이야기에서 보면, 기독교의 로마내 세력확장에 대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의 기독교의 교세확장은 일제 말기와 한국전쟁의 비참한 시기에 그 전기를 마련한 것입니다. 일본은 그런 시기를 겪지 않았으므로 자신의 정신세계를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

 

조조와 유비에 대한 평가의 차이는 그 출신성분에 따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유비는 소위 황숙이고 조조는 내시의 양자이니까요. '왕자와 거지' 이야기에서 거지가 된 왕자가 다시 자기 지리를 찾기를 바라는 심리와 같은 것 아닐런지요.

 

체면과 종교가 연결되는 것은 탁견이십니다. 둘다 신념체계의 문제이고. 한 신념체계에서의 체면을 다른 신념으로는 무가치한 것으로 보아 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프라이드와 에고는 다르게 보아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최근 '담배가게 성자'와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읽고 있는데. 그 두 책의 공통점은 '내' 가 따로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그게 없어질 때 그것을 '신' 이라고 보면 기독교 또는 유신론이 되는 것이고요. 그게 그냥 인격적이 아닌 그 무엇으로 보면 불교 또는 무신론이 되는 것입니다. 무신론을 유물론이나 범신론과 동의어로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唯心論의 心을 氣 또는 物자체, Da Sein 으로 치환한 것입니다.

 

事大는 과연 무엇인가요? 그것은 생존의 문제가 아니었을런지요? 오늘날 우리에게는 4 대 강국의 카드가 있지만. 옛날 우리에게 중국 말고 어떤 대안이 있었을까요. 당시에 오늘날 우리가 개념짓는 한국문명이 과연 존재했는지요? 사대와 중세 봉건 그리고 사대와 현대 과학 관련 생각들이 마구 떠오릅니다. ㅎㅎ

 

H兄 :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것과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중에 그것을 터득하는 것은 조금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유신론 무신론 이런 논리 속에서는 과연 있는데 없다는 것인지 없는데도 있다는 것인지. 이미 존재하는 그 자체를 우리가 정의를 한 들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하나님은 그 자체로 존재하기에 우리의 지식으로 철학적이라고 분석을 한들 아무래도 부처님 손바닥에 노는 손오공 같은 것 같아요.

 

사대주의라는 것은 외교적인 봉건적인 국제관계의 영향도 있지만 조선시대에 유교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자연스레 중국의 사고방식을 많이 답습했다고 볼수 있지 않을까요.

 

나 : 당시에 중국의 사고방식이란 무엇입니까? 오늘날 우리가 서양과학문명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듯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지요? 현재 서양과학문명에 대항할 만한 무슨 아즈텍 문명이라도 있습니까? 당시에는 중국문명이 우리에게는 그 표준이었고. 그 속에서 중국문명의 기반 위에서 한국문명을 꽃피웠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유대인의 유일신관을 통해 발전한 것입니다. 기독교인만이 가치있고 훌륭한 삶입니까? 세상에는 그만큼의 훌륭한 삶과 전거도 많이 있습니다. 왜 다른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은 이해하려 하지 않는지요?

 

H兄 : 신앙하고 신념하고는 많이 달라서, 나는 신앙인으로서 말하는 부분이 있어요, 많은 부분 신앙에 근거하여 지금은 사고하고 있어요. 이전에 잡다한 것도 다 고려를 하였는데 정리가 되니까,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다른 것을 무시하거나 그러지는 않아요. 이제 나에게 개인적으로는 이전에 대충은 답습을 하여서 새롭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개인적인 시각이지요. 그리고 다른 사상이나 사고도 다 존경하고 이해하고 있다고 보고 있어요. 이 모든 것인 지적인 발전으로이루어진 것인데 이 지적인 발전은 이 우주와 자연에서 벌써 있는 것을 우리가 조금씩 깨달아오고 하여 이제 많이 알고 있지요. 그런데 이것이 만들어 졌던 처음부터 벌써 있었던 것이라서 새삼스러울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창조했다는 창조주가 있다면 말이죠.

 

나는 서양과학문명이 옳고 동양과학이 틀리고 그렇게는 보지 않아요. 다른 각도로 보기에 발전양식이 많이 달라서. 단지 중국의 문명의 발전이 먼저 이루어짐에도 왜 르네상스나 산업혁명이 중국에서 먼저 일어나지 않고 유럽에서 일어났는가를 생각볼 필요가 있어요. 경제사연구로 노벨상을 받은 North교수가 연구결과가 있어요. 한국의 문화의 발전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성장하였지만 실제는 한국의 문화발전은 중국을 능가하는 많은 과학적인 발전이 있어요. 헌데, 우리가 그런 능력을 제대로 발휘를 하지 못하고 사대주의적인 사고의 영향이 크다고 보고 그리고 유교적인 봉건적인 관계 속에서는 진정한 지적개발이 장애가 되어왔어요. 그래서 우리의 활자문화는 세계에서 최고이고 최초의 엄청난 첨단 기술이었지만 우리의 90% 이상의 대중은 그런 지적인 과학적인 혜택을 받지를 못햇어요.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처음으로 만들고 찍은 책은 독일어로된 신약성경입니다. 그 당시는 조선처럼 그런 사회였어요. 그런데 구텐베르크는 그리고 구교의 많은 문제들 속에서 하나님이 신부를 통하지 않고도 구원한다는 신교의 영향이 그래서 성경책을 일반인 평민은 읽을수도 없고 가질수도 없었는데, 구텐베르크는 독일어로 찍어서 일반대중에게 전달하였어요. 이게 엄청난 유럽의 문화혁명을 르네상스나 산업혁명과 민주주의 기초를 가져오게 됩니다. 우리의 문화발전과 전통과 유교적인 가치관과 많이 달랐죠. 구텐베르크는 나중에 잡혀서 죽던가 하여튼 탄핵을 받죠.

 

나 : 중국의 문명 발전이 서양 보다 앞섰다는 것은 잘못 보신 것입니다. 그것은 서양의 중세 시대의 그것도 10C~14C 의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서양문명은 이미 그리스 로마시대 또는 그 이전에 이미 오늘날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알려진 (기술 축적이 아닌) 것들의 기초를 이미 세워 놓았습니다. 제가 보기엔 기원전에는 2000년 기원후에는 천년 정도 문명의 발전이 (중국이 서양에 비해) 늦습니다. 소위 중세암흑기란 것도 서양문명이 본격적으로 용틀임하기 위한 환골탈태의 시기이었으니. 바로 그것은 헤브라이즘이 깊숙이 헬레니즘에 녹아 융합하는 기간이었습니다.

기독교는 반문명 반과학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날의 과학문명에 지대한 공헌을 한 새로운 피였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영원성과 극한에의 추구를 통하여서 입니다. 중세시대의 일시적인 부와 기술 수준을 평면적으로 분석한 니이담 등의 학자들은 동양의 자존심은 세웠을지 모르나 진정으로 세계문명에 기여하는 동양의 가치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한 고비 한 고비 넘을 때마다 쓸모 있는 사람과 신념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일본의 기초과학으로 노벨상 등을 수상하는 사람들을 볼 때, 동양이 기여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서양이 넘지 못한 벽을 우리가 넘겨줄 순간이 올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철저한 자기부정을 통하여 자신을 똑바로 인식하고 공동의 세계문명에 동참하였기 때문입니다.

 

H兄 : 나는 한국의 문화발전이 중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중국을 넘어섰다고 생각해. 불교도, 유교도 그렇고 활자기술등. 단지 그 엄청난 과학적 문화적 발전을 이루고도 우리나라에서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못한 것은 무엇때문일까라고 생각하지. 그래서 지금도 개도국의 성장발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이거던 인적자본. 이것은 간단히 이야기하면 국민의 평균적 쓰고 읽는 능력에 좌우됩니다. 유럽이나 우리나라나 중국이나 고대시대에도 문화적 과학적 발전이 있었지,그것을 어떻게 전 국민들이 고르게 잘 활용하였는가 환경이 되었는가. 유럽은 구텐베르크의 활자인쇄에 의하여 급격히 literacy가 발전하였고 그러니 성경을 라틴어가 아니라 친근한 독일어로 읽음으로써 자연스레 깨우치고. 우리의 직지심경은 불경인데, 불경은 대중이 읽어서는 아무도 모르는 그런 더욱 어려운 산스크리트 문자인데. 그 당시 나중에라도 세종대왕때에 한글로 인쇄를 하여 책을 찍었다면 아마도 엄청난 일이 한국에 일어났을 것인데... 그런 상상을 합니다.

 

나 : 우리나라가 과거에 중국 보다 앞섰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 될 수 없습니다. 우선 불교에 원효가 있지만. 중국에도 법장과 지의가 있습니다. 이는 통섭을 하신 분의 기준으로 말한 것이고, 중국에서 새로 창조된 불교인 선가의 계보는 또 어떠합니까? 유교를 놓고 보아도, 한국은 주자학 교조주의 였지만, 중국은 양명학과 고증학이 또 새로 발흥합니다. Niche 부문에서 일부 깊이가 있는지는 몰라도 다양성과 규모에 있어서 차이는 큽니다. 한국유학의 집대성자로서 다산을 염두에 두시는지 몰라도 순조가 즉위하는 1800년이면, 세계는 이미 19C 로서 동양의 좁은 틀로 학문의 수준을 평가할 수 없는 때입니다.

 

금속활자를 볼 때도 후손으로서의 자랑스러움과 함께 보아야 할 것은 그 활용성의 차이입니다. 구텐베르크의 활자는 표음글자이기에 적은 수의 글자체로 쉬운 조판과 함께 저렴한 비용으로 책을 찍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판의 견고성이 필요하여 금속으로 한 것입니다. 당시 유럽은 수도자들이 아름다운 필사본을 만들어 내던 때여서, 비록 활자로 찍어낸 책이지만 필사본처럼 고급스럽게 보이게 하려고 장정이나 디자인 등에서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우리의 금속활자는 책의 보급이나 저렴한 제작비용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표의문자인 5만~10만여개인 한자의 숫자를 생각해보시면 쉽게 상상하실 수가 있고, 다만 목판인쇄보다도 더 정교하여 번지지 않는 고급책을 제작하고자 한 것입니다. 결국 후대에 대중화된 것은 목판인쇄입니다. 같은 금속활자라도 그 도입배경, 사용효율, 파급효과가 다른 것입니다. 결국 훈민정음의 창제 이후 표음문자인 한글과 금속활자의 결합이 있었는지? 철자의 자판을 배열하여 조판하는 활판인쇄술이 한국에도 있었는지? 등은 좀 더 확인해보야 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본질은 활자의 금속성 여부가 아니라 출판의 효율성과 저렴함이기 때문입니다.

훈민정음 창제 후 세종은 수양대군과 정인지 등을 시켜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 등의 불교서적을 편찬케 하였습니다. 그 후 두시언해, 향약집성방, 농사직설 등의 중요 도서의 편찬이 장려되었습니다. 이 중 한글인쇄물의 활용정도 및 이후 한글사용확대의 역사를 보고싶어지네요. 그런데 여기서 직시하여야 할것은 한글의 우수성은 만천하가 인정하고 다 아는 것이지만, 그 창제가 매우 늦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8C경에 이미 가나로 문자 생활을 시작하고 자국어로 자기역사를 기술한 일본에 뒤쳐진 것이며, 이미 이때 일본은 자기의 정체성과 자기문명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문명이란 몇몇 특권층의 문자생활이 아닌 전계급의 문자생활을 통해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미 10C만 되어도 일본은 대중의 문화생활이 번창하지 않습니까? 그에 반해 한국은 일제시대를 거치며 계급이 무너지고 한글이 표준어가 되면서 비로소 비약적 사회발전을 이룩하는 것이며 비로소 우리말과 우리글로 된 한국문명을 운위하기에 이르는 것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H兄 : 한글의 우수성은 한민족의 유일무이한 우월성을 증거하고도 남습니다. 그리고 인쇄술 이것도 목판인쇄술, 금속활자인쇄, 등등 모두 세계기록을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한자의 인쇄술은 지적한 대로 인쇄술의 기술로는 그 많은 표의문자를 일일이 다 만들어야 해요. 한글이 인쇄술에 응용된 것은 극히 예외라고 생각이 됩니다. 한글로 된 시가 등장하는 것이 극히 일부의 책입니다. 참고로, 방촌집이라고 있어요. 우리 장수 황씨 시조인 황 희의 자손들이 만들어낸 책인데, 그 곳에도 한글로 된 시가 2-3개 있어요. 대학교 입학하여 대학 도서관에서 제일 처음 빌려 본 책이 방촌집이었습니다. 우리 할배가 어떻게 생겨나 그리고 어떤 글을 쓰나 그런 것이 궁금했어요. 훈민정음은 금속인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목판인쇄겠지요. 아니면 손으로 쓴 것을 필사했던가. 일본도 나도 좀 더 조사해야 하나, 우리와 별반 다르지않았다고 봅니다. 한자를 사용하여 기록하였으니까. 하지만 가나문자의 문화는 우리의 한글보다는 월씬 역사가 깊고 신라의 향찰이나 이두가 전래되어 일본어의 가나가 됬다고 보는 시각이 많지요. 그런데 일본어 가나의 문자의 사용하기 편함은 나는 너무나 놀랍니다. 세상에 이렇게 쉬운 언어가 있을까. 물론 한글도 아주 쉽고 그렇지만. 아이들이 버스타고 가면서 간판만 찾아 읽으면 히라가나는 그냥 마스터됩니다. 그럼, 곧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아이들도 보지만 일본아이들이 아주 빨리 언어를 습득하고 곧 독서에 몰입하니 언어 및 지적 수준이 금방 자라지요.

한글의 창제가 늦었다고는 보지 않아요.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무시한 것이 큰 문제였지요. 세계최고의 인쇄술과 한글이 조선시대에 만났더라면 한국의 최고의 문화 르네상스를 맞이하였을 거라고 추측해요. 물론 봉건적인 제도가 무너지고 다른 민주적인 그런 사회가 빨리 오지 않았을까라고 생각은 해요. 왜냐하면 식자율이 높아진 민중이 지적인 수준이 높아지고 비판의식이 높아지고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하면서 계급사회의 모순을 타파할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2010년 12월 12일 ~ )

 

Posted by 돌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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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기니 섬에는 5만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


유럽인들에게 처음 알려진 건 1512년 포르투갈 탐험가들이 남태평양을 항해하다가 이 곳을 지나면서였는데 첫번째 상륙도 역시 포르투갈 인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때 이 섬을 'Ilhas dos Papuas'라고 이름 지었고 이것이 'New Guinea'의 발견이라고 역사책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16세기에 여러형태의 탐험... 단지 동인도제도(인도네시아)에서 상당한 경제적 이익을 거두고 있던 네덜란드만이 뉴기니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는데 그것은 동인도 제도를 다른 유럽국가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자구책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영국동인도회사는 1793년에 뉴기니섬 전체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지만 1824년 뉴기니섬의 서쪽 (지금의 이리얀자야, 인도네시아) 절반에 대해서 네덜란드의 영유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편의상 직선으로 섬을 분할하게 됩니다.


영국령인 동쪽 뉴기니섬의 북부지역에서는 제 3의 식민지배 세력인 독일이 상당한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영국이 1884년 동쪽 뉴기니섬의 식민지배를 선언하자 독일은 재빨리 북쪽 해안에 깃발을 꽂고 그들의 식민지를 선포했습니다. 

 

 

<뉴기니섬 : 서 뉴기니는 네덜란드령, 동 뉴기니 중 북부는 독일령, 동 뉴기중 남부는 영국령>

 

 그로 인해 동쪽 뉴기니섬은 다시 남북으로 영국령과 독일령으로 나뉘게 되었고... 영국은 동쪽 뉴기니에 새로운 법과 질서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죠. 1888년... 경찰을 창설했고 1909년 영국뉴기니는 파푸아(Papua)로 나라이름이 바뀌면서 새로 독립한 호주에게 통치권이 위임되었습니다.

 

1차 대전 중 호주군은 독일 뉴기니를 7년 동안 다스리다 1920년 호주정부에 넘겨주게 됩니다. 


2차 대전 중에는 잠시 일본군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2차 대전이 끝나고 난 뒤 호주령의 파푸아(동 뉴기니의 남부)와 전 독일령에서 호주령이 된 뉴기니(동 뉴기니의 북부)가 통합되어 파푸아 뉴기니(Papua & New Guinea)가 되었고 1973년에 자치정부가 설립된 후 1975년에 완전한 독립을 이루게 됩니다.

 

반면 서 뉴기니는 네덜란드의 영향아래 있었고 네덜란드 동인도는 서 뉴기니를 제외하고 1949년에 인도네시아라는 이름으로 네덜란드로 부터 독립을 하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1950년대에 네덜란드는 서 뉴기니를 독립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만 1961년에 인도네시아의 강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어 1962년에 네덜란드는 서뉴기니에서 손을 떼게 되고 1963년에 인도네시아의 통제하에 들어간 후 현재에 이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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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 그런데 가만히 보면, 뉴기니섬을 인도네시아와 파푸아뉴기니로 나누는 선은 사라고사 조약의 동경 144도 30분에 근사하다는 사실, 참으로 기막히다.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의 영역을 넘겨받고, 영국은 스페인의 영역을 넘겨받은 것으로 간주한 것일까?

 

(2011년)

 


Posted by 돌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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