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의 잠꼬대이나 기개는 장하다"


박은식 선생은 '한국통사(痛史)'에서 망국의 출발점을 두 차례 양화(洋禍)에서 찾는다... 병인·신미양요를 말한다... '(적들이 물러간 뒤) 우리 문물과 무력이 충분하다고 자만하여 완고오만[頑傲驕悍]으로 중흥의 기회를 놓친' 데에서 그는 조선 망국의 실마리를 찾았다.


두 차례 양화는 각각 1866년과 1871년에 일어났다... 양화를 끝낸 흥선대원군은 이런 시(詩)를 읊었다고 한다. "서양 배의 포연으로 천하가 어두워도 동방의 일월은 만년을 밝히리라."


박은식 선생은 그 당시 조선이 "양화를 계기로 스스로 소경이 되었다"고 한탄했다... 당시 일본은 자국의 체제 변화를 알리는 외교문서를 조선에 전하려고 했다. 그런데 조선은 내용을 중시하지 않고 자구를 문제 삼아 문서 접수를 거부했다. 일본이 주제넘게 '황(皇)'이란 글자를 썼다는 이유였다... 외교문서 거부가 일본에서 '정한론(征韓論)' 파동으로 연결돼 내전(內戰)으로 확대된 실상을 제대로 모르고 일제(日帝)를 맞았다.


1853년 일본에... 개항을 요구한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黑船) 내항을... 고위 관료였던 마나베 아키카쓰가 당시 소심하게 읊어댄 시(詩)가... '평온한 졸음을 깨운 증기선, 단 네 척에 밤잠도 못 이뤄.'


조선과 일본은 완전히 다른 '19세기적 사고'로 서양 세력을 대했다. 변화하는 현실을 '동방일월 만년명(東方日月 萬年明)'의 자존심으로 대할 것인가, '단 네 척에 밤잠을 못 이루는' 위기 의식으로 대할 것인가. 이 선택이 정반대의 역사를 만들었다.


... 19세기... 십 수년 동안 청나라·일본·러시아라는 호랑이 등을 올라탄 조선의 곡예는 읽는 것만으로 어지럽고 아슬아슬하다... 열강의 유혹을 조선을 위한 러브콜로 인식한 것이다.


박은식 선생은 '완고오만'을 대체한 조선의 이런 양태를 "조진모초(朝秦暮楚) 택강이교(擇强而交)"라고 비판했다. '아침엔 진나라에 붙고 저녁엔 초나라에 붙듯이 강한 나라를 택하여 사귄다'는 뜻이다... "실로 남에게 의뢰하여 한때 겨우 편안하니 그것이 능히 오래가겠는가."


... 한국에 배달되는 청구서를 '러브콜'로 해석하고 나아가 '축복'이라고 호언하는 현실 인식에선 자만과 착각이 교차한 19세기 냄새를 느낀다. 중국이 굴기하고 미국의 힘을 일본이 대신하는 최근 동북아 흐름이 정말 한국에 축복인가...


박은식 선생은 대원군의 시(詩)를... 이렇게 논평했다. "한때의 잠꼬대에 불과하지만 기개는 장하지 아니한가(一時夢語 不亦壯乎)." 지금... 필요한 것은 기개(氣槪)가 아니라 지혜, 그리고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는 겸손이다.

(조선일보, 2015. 04.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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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사실 존재 자체가 경계지대인 반도국가에서 허세라 할 기개도 없다면, 무엇으로 하루인들 버틸 수 있을까요...


Posted by 돌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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