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轉 III            

                                            강은교

 

 

 

문(門)을 열면 모든 길이 일어선다.

새벽에 높이 쌓인 집들은 흔들리고

문득 달려나와 빈 가지에 걸리는

수세기(數世紀) 낡은 햇빛들

사람들은 굴뚝마다 연기(煙氣)를 갈아 꽂는다.

길이 많아서 길을 잃어버리고

늦게 깬 바람이 서둘고 있구나.

작은 새들은

신경(神經)의 담너머 기웃거리거나

마을의 반대쪽으로 사라지고

핏줄 속에는 어제 마신 비

출렁이는 살의

흐린 신발소리

풀잎이 제가 입은 옷을 전부 벗어

맑은 하늘을 향해 던진다.

 

문(門)을 열면 모든 길을 달려가는

한 사람의 시야(視野)

허공(虛空)에 투신하는 외로운 연기(煙氣)들

길은 일어서서 진종일(盡終日) 나붓기고

꽃밭을 나온 사과 몇 알이

폐허(廢虛)로 가는 길을 묻고 있다.

 

([풀잎] 민음 74)

 

 


감상 : 한국 순수 서정시의 계보(공력, Skill, Image)가 느껴지는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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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돌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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