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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兄 : 개신교에도 회수는 다르지만 똑같이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거짓이라면 그것에 수반하는 절차도 거짓이겠지요. 먼저 믿고 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즐겁게 하고 곧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을까요. 믿고자 하는 마음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인도하심 성령의 은혜라고 봅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나 : 카톨릭의 미사는 제사이다. 집사람은 신교 출신이어서 (성당에 갈 때) 나보고 청바지 입고 가라고 하는데 그건 안될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신교의 예배는 축제이다. 성가도 아주 즐겁게 부른다. 어깨를 들썩이며... 물론 카톨릭 미사때도 노래는 즐겁다. 그러나 어깨를 들썩이는 것은 안 될 말이다. 어디까지나 근엄하게 기쁨을 삭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제사라니깐요.
카톨릭 종교생활의 힘든 점은 성체성사와 고해성사이다. 미사에 갔으면 성체성사를 해야 한다. 성체성사가 없으면 암코 없는 찐빵이다. 그런데 성체성사를 하려면. 죄가 없어야 한다. (즉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 우리 죄많은 자들은 그러니 항상 짓는 죄를 신부님께 가서 그대로 고하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자신의 잘못을 낱낱이 밝혀 말하는 것 이것이 아마도 가장 큰 고역이다.
그런데 고해성사를 신부님께 가서 하느님께 죄를 빌기 전에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면 관계된 사람들과 먼저 화해이든 용서이든 구한 다음에 신부님께 가야 한다는 점이다.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카톨릭은 항상 죄를 달고 사는 Business man 이 다니기 쉬운 종교는 분명 아니다. 그래서 성당에서 보면 남자들은 별로 없다. 주로 아내들이 남편의 구원을 위해 다니는 것일까?
오늘날과 같은 과학문명의 시대에 어찌해서 신앙인이 이렇게 많은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아직 죽음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 종교에 귀의하게 된다. 달리 할 일도 없고^^ 보험삼아 다니는 얄팍한 계산 속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제 장기(臟器)도 부품처럼 갈아끼고 복제도 하면서 영원에 가까운 삶을 누리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도 종교가 필요할까요?
M兄 : 차라리 빨리 죽게 해달라는 사람들이 종교를 찾을지도 모릅니다. ㅎㅎㅎ
K兄 : 내 구원이 아니라 우리들 공동체 구원을 생각하면 신앙을 다르게 접근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 : 우리집은 지차 집으로 큰집의 제사에 자주 참석합니다. 저도 큰집 동생이 안올 때에는 제주(祭主)는 못되어도 집사를 하기도 합니다. 가만히 그 제사(차례)의 절차를 살펴보면 성당의 미사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사제와 복사가 있듯이 제주와 집사가 있다. 독서와 강론이 있듯이 독축(축문 읽기)이 있다. 미사에 포도주가 필요한데 차례에는 청주(정종-일본말 마사무네. 청주의 한 브랜드) 를 씁니다. 성체성사가 있듯이 음복을 합니다. 본질이 똑 같은데 어째서 우리는 남의 것을 이리도 숭상하는지요?
그러고 보니 다른 점이 있네요. 우리 제사는 조상(잘 났거나. 못 났거나) 을 모시므로. 자기집 울타리를 못 벗어나지만. 미사는 큰 뜻을 펼치신 예수님만을 모시는 것이므로 그의 뜻에 동참한다면 모든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는 제사가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를 보편종교로 이끈 힘이겠지요. 그래도 저는 항상 남의 나라 역사와 설교를 제것인 양 말하고 듣는 것이 불편합니다. 과학은 우리가 못해서 할 수 없이 배웠지만. 종교마저도... 이걸 뭐 벤치마킹이라고 해야 할지 ^^
죽음이 해결되면 외로움이 남지 않을까요?
M兄 : 삶과 죽음은 공존하지요. 또한 죽음은 새로운 삶의 문이고요. 잘 살면 잘 죽을 것입니다!
나 : 공동체의 구원은 지상천국이란 것으로서 맑스의 사상과 통하지요~ 해방신학과도 연결되는데 인간의 심성이 과연 함께 남을 잘 도우면서 살 수 있을 만큼 이타적일까요? 그러면서도 문명의 진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M兄 : 저는 어떤 인간도 온전히 이기적이거나 이타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과 믿음만이 중요한 진실이겠지요. 자신을 비롯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이타적이 되도록 하시죠.
H兄 : 유교의 제사가 미사와 비슷하다면 아마도 어떤 유래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위는 대동소이하고요 그래서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의 생활양식이 현대 우리에게도 대동소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겠죠. 조상숭배사상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원래의 조상을 찾아가면 그 처음에는 그 누구를 제사를 지내야 할까요. 왕이나 부족장을 모셨을까요. 왜 그래야하는지 죽은 사람을 제사지내는 것은. 어떤 필연성이 있지 않은가요. 어떤 지역에는 죽으면 그냥 내다버리죠. 네팔이나 티벳등지에. 저는 그런 의문을 갖습니다.
나 : 엘리아데의 '성과 속'이란 책을 참조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사실은 저도 읽지는 못했습니다. 책 제목 도 저자도 아리까리 합니다 벌써 대학을 벗어난지도 20년도 더 지났으니까요. ㅋㅋ
유교에서는 조상을 제사지내되 4대까지만 지냅니다. 한 100년 정도 되면 혼백이 흩어진다고 보니까요.
네팔이나 티벳의 장례는 조장이나 풍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냥 내다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각 문화 마다의 고인에 대한 예의 체계가 있는 것이지요. 왜 제사를 지내느냐고요? 슬프니까요. 죽음은 또한 이별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먼 길 떠나는 순례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편안히 여행하기를 그리고 우리 안에 함께 하기를 바라는 것이겠지요. 저도 모르게 술술 나오네요. ^^*
H兄 : 우리가 보면 내다버린 것으로 된다는 이야기지만. 죽음이 곧 새로운 탄생이다라고 보고 즐거울 수 있겠는데. 어렵겠지요. 우리의 한이라는 정서는 제사에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죽음이 곧 모든 한의 결말인 듯. 아니면 출발일 수도.
나 : 삶과 죽음의 공존!!! 그러고 보니 죽음이 없으면 삶도 없네요. (시간과 생명에 대한 인식이 필요함) 그러고 보면 우린 살아야 하니 죽음은 항상 존재하게 되고 결국 종교도 필요하고. 따라서 남의 나라 역사를 들먹이는 설교를 계속 들어야 하겠네요. TT. (죽음->종교 에서 약간의 논리적 비약이 느껴짐. 그렇다면 다른 대안은?)
(2011년 5월 9일 ~ )
감상 : 이때는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이었다. 아직 진짜 이별을 대면하기 전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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