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 보는 여자
김기택
그녀의 눈으로 끊임없이 글자들이 지나간다. 책상 위에 휴지통에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그녀는 종일 빠지고 넘어져 잘못된 글자들을 골라내어 제자리에 앉혀 준다. 글자들은 모래알처럼 많고 모래알처럼 딱딱하다. 그녀의 눈 속에 촘촘하게 박힌다. 뜨겁고 눈부신 태양의 조명 아래 모래알 가득한 눈을 껌벅거리며 그녀는 낙타처럼 글자의 사막을 지나간다. 가끔 눈이 너무 아프면 잠시 감아 보기도 한다. 글자들은 눈알에 깊이 음각되어, 감은 눈에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면 그녀는 곧 음각된 글자들을 손등으로 꾹꾹 누르고 다시 눈을 열어 글자 속으로 들어간다.
이윽고 교정지 위로 어둠이 내린다. 그녀는 넓고 두툼한 어둠으로 글자들을 덮는다. 모래상처가 난 눈을 감는다. 눈물이 가만히 상처들을 만져 본다. 상처가 조금씩 소스라치며 씻긴다. 이윽고 글자들은 어둠의 두툼함 속에 묻히고 그녀의 눈은 편안해진다. 그녀는 손바닥에 닿는 어둠을 더듬더듬 만져 본다. 오래 오래 그 감촉들을 음미해 본다. 손가락 끝은 단 맛을 모르지요. 향긋한 냄새와 혀끝의 짜릿함도 모르지요. 하지만 낡은 표현의 우둘두툴한 편안함은 더 잘 안답니다. 허름한 진동의 온기와 기침 속에서 떨리는 등뼈의 정다운 울림은 더 잘 안답니다.
말 속에 말들이 있다. 손가락 끝에서 만져졌던 말은 가슴에 와서 작은 누룩 속에 들어 있는 빵처럼 크고 둘글어진다. 눈에서 녹아 가슴에 내린 글자의 상처들을 동그랗게 싸고 부풀어 오르는 말의 향기들. 숨쉴 때마다 그녀의 부푼 가슴에서는 빵 굽는 냄새가 난다.
(현대시세계, 1992, 가을)
감상 : 말 속의 말이 교정 보는 여자 속에 들어가 빵으로 구워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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