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호 3

- 눈이 오는 건 그녀가 내게 오기 때문이야                       장석남




신촌 크리스탈 백화점 앞에서 눈을 맞는다

눈이 오니까 그녀는 지금

눈길을 오리라

그녀 뒤의 발자국을 눈은 지우리라

자꾸 눈발은 등을 민다 그녀는

등을 밀리며 오리라 리어카 스피커에서

한 생애가 쏟아져나와

쉽게 살얼음이 되는 것 바라보며

사람들은 찬 이마와 머리칼을 데리고

어디로 가나 그녀는 지금

손아귀에 깊은 골짜기를 쥐고 오리라

눈길을 오며 그녀는 아이를 가지리라

재개봉 영화 간판을 올리며 눈발 속의 한 인부가

흑백 화면처럼 저녁을 가린다

강화버스 쪽으로 골목 하나 사라지고

그 자리에 적막한 불빛을 물고

강화버스가 두런두런 들어선다

골짜기 내게 가까와 어깨에 묻은 눈을 털고

말없이 손을 잡고 나는 

그녀에게 入山한다

눈길을 다시 가며 그녀는 호두나무꽃 같은

아이를 가지리라




감상 : 강화버스는 강화도로 가는 버스이다. 시인은 섬 출신이어서 강화버스가 익숙한 보통명사로 느껴진 모양이다. 배호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좋아한 가수이다. 정작 나는 잘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 시를 감상하는 한 꼭지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배호는 사랑 노래를 잘 부른 가수가 아니었을까? 이 시의 압권은 '그녀에게 入山한다' 이다. 그 다음 두 행은 사족이 아니었을까? '흑백 화면처럼 저녁을 가린다' 에선 기형도의 [안개]가 연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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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돌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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