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한다. 이에 대해 소위 지식인 이란 자들은 무엇인가가 펜에서 나온다고들 했다. 이제 펜대 대신에 트위틀 손에 든 내게 무언가가 나오는데 난 그것이 무언지는 모르겠다. 나의 지저귐에서.
트위틔 좋은 점 이제 책을 안 들고 다녀도 된다는 점. 읽기만 하다가 마구 쏟아낼 수 있다는 점. 나 혼자 좋아서...
힘은 돈, 권력, 명예 로 정의되기도 한다. 나는 그 힘을 대사와 생식으로 분류하고 싶다. 그 우선 순위가 있다면. 그것은 생식이다, 바이러스를 보면 알 수가 있다. 그렇지만 일상의 비중으로 나는 그 비율을 7:3 으로 본다. 이때 대사가 7이다.
평소 내가 짐승스러움을 느낄 때는 치과에 갈 때인데. 신경치료를 하며 임플란트 전단계라 할 수 있는 치아의 고목화를 단행하고 보니 내가 마치 로봇이 된 기분이다. 트위틀 하며 무척 신이나 된 듯 고무되었었는데... 집단지능의 신 말이다.
임플 말고 신경치료. 이거 안하고 있으면. 임플 해야 된대. 임플은 이빨을 나사처럼 박는거고 신경치료는 신경을 제거한 다음 이빨을 깍아, 그리곤 그위에 이빨 깝데기를 씌우는 거야.
어릴 적, 초딩 때, 군데군데 흑염소를 한 두 마리씩 학교 담벼락에 매어놓고는 풀 뜯어먹게 해놓은 것을, 가끔 지나가는 고딩 형아들이 흑염소 젖 서리 하던 게 눈에 선하네요. 뿔에 받히지나 않을까 지켜보던 부러움까지...
사각지대없는 사이드 미러 기술이 개발되었다 함. 부라보!!!
다른 입장에 대한 증오와 동류의식이 트윝 세상에 좀 과잉이란 느낌입니다.
그저께 영어학원 에서 영어 티처가 어리게 보였는데. 나이는 37이다. 내가 20대 후반으로 보인다고 하자. 그것은 자기가 immature 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대답을 하였다. 그 순간 나는 그것이 '철이 없어서요' 라고 이해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뜻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아무래도 우리가 지향하는 철든 인간이 가지는 내면성과 서양인이 지향하는 원숙한 인간이 가지는 외면성의 괴리가 갑자기 느껴진다.
이러한 2분법적 구분의 타당성을 제쳐놓고 철은 언제 들고. 어떤 모습일까? 자기가 철이 잘 들었다고 자신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내 생각에는 철도 깨달음의 일종이고 그것은 점수돈오와 돈오점수의 과정을 거쳐 내면화되는 것이란 느낌이다.
한번 깨달으면 그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면. 왜 육조 혜능이 오조 홍인에게 의발을 받은 이후에도 18년간이나 산속에 숨어 정진하였겠는가? 그래서 설사 무언가를 어느 순간 알았다 해도. 진정한 자기 것이 되기 위한 시간도 쉽지 않다는 것을.
최초에 무엇인가 어렴풋이. 또는 홀연 완벽히 깨닫는 순간을 맛보기 위해서도 엄청난 공덕을 쌓아야 하겠지만.
It's male. Unhappily. <-> ㅎㅎ 머튜어 에 섹스 관련 뜻이 있나 보군.
언어를 버려야 깨달음이 오지 않을까요?
웬 비트겐슈타인. 이름을 지어보라. 한 세계가 열린다.
추석특집으로 '아우더브 아프리카' 를 보는데 매독 치료제로 살바르산이란 이름이 나온다. 옛날에 볼 때는 몰랐는데. 그 옛날 제대로 된 현대적 치료제가 없었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이런 치료제가 그 얼마나 중요한 인류의 업적인 것인지.
조관우의 '이별이 너무 길다' 의 가사 중에 노둣돌 이란 단어가 생소하면서도 듣기 참 좋다. 뜻을 찾아 보니 하마석이다. 말을 탈 때의 발 디딤돌이다. 덤으로 안 들리던 가사까지 확인.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 다시 만날 우리는' 에서 ##은?
이별이 너무 길다는 문병란의 시 직녀에게 를 김원중이 노래한 것이 원곡이네요. 원곡도 다시 들어보고 싶네요. 갑자기.
노벨문학상 소동에서 참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안타까워하는 그들이 그 시인의 작품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또 좋아하느냐? 이다. 나는 그의 시를 좋아해보려고 많이도 읽어보았지만. 어떠한 문학적 감동을 가져보지 못했다.
내 생각에 한국시에 있어서 1995년 이전까지는 기형도 와 장석남이 최고이다. 바둑으로 치면. 기형도는 9단. 장석남은 8단을 주고 싶다. 그들은 한국시의 최고의 경지를 개척하였다. 1995년이후에 장석남이 얼마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는지?
또다른 훌륭한 시인이 등단하였는지는 모르겠다. 그 이후로는 시를 읽지 않았으니. 한국소설에서 최고의 경지로는 박상륭이 있었다. 역시. 1995년이후의 한국소설은 모른다. 인터넷이 본격 등장한 이후 시와 소설을 음미하는 사치가 범인에게 허용되지 않아서?
나의 의견으로는 노벨문학상 이라고 할 때 번역의 문제를 떠나 그나라에서 그의 작품이 동시대인들에게 진정으로 감동을 주고 사랑받고 있느냐? 이다. 만약 그렇다면 노벨문학상 은 전혀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국어도 모르는 그들이 주는 상에 의해 문학이 더욱더 가치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동계올림픽으로 무주가 아니라 평창에 올인하듯이, 노벨상을 따기 위해 한 분으로 올인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이것은 그분에게도 한국문학의 가치측면에서도 결코 바람직 스럽지 않다.
문학은 번역의 문제가 있다. 특히 시는 그 측면 때문에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 나라언어를 조금 공부하기도 한다. 이러한 번역상의 문제가 없어 보이는 분이어서 미는 것일까. 다른 분들은 없는 것일까. 문학 외의 부분도 중요하겠으나 문학은 문학으로.
감동만이 진정한 문학이고 진정한 노벨상이다. 타의 권위로 아를 재단하는 한, 한국인의 문학적 수준은 결코 높아지지 않을 것이다. 아의 감동이 물결쳐 타마저 감동 시킬 때. 한국문명은 더욱 발전하고 또 인류의 앞으로 디디는 한 걸음에 기여할 것이다.
매년 계속되는 소동에 동참 안하면 비애국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느낌에 대한 나의 반응 ^^
(2010년)